운보김기창 -八旬記念 대회고전
운보김기창 -八旬記念 대회고전

1세(1914년, 호적상으로는 1913년)
2월 18일 오후 2시 20분 호랑이띠로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 18번지에서 부친인 김승환金升煥과 모친인 한윤명韓潤明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남. 이후 형제는 8남매가 되며, 부친은 김해김씨金海金氏, 모친은 청주한씨淸州韓氏였고, 호적상으로는 1년 이른 1913년 2월 18일에 충남 공주군 신상면 유구리 427번지에서 태어난 것으로 되어 있음. 1903년 아버지 김승환은 조선경趙善慶이라는 첫부인과 결혼을 한 후 다시 운보의 어머니인 한윤명과 동거를 함으로써 호적상으로는 운보의 어머니가 한동안 조선경으로 되어 있는 등 서류와 실제가 이원화됨.
외할머니는 이정진李貞鎭으로 황해도가 고향이며, 충북에 살았던 외할아버지 한씨韓氏와 결혼하였고, 30세에 과부가 된 이후 77세까지 살면서 운보를 보살핀 외할머니이기도 함.
어머니는 감리교 신자였으며, 개화된 교육을 받은 진명여고 1회 졸업생으로, 17세나 18세에 동거적인 결혼생활에 들어감. 아버지는 충남 공주 태생으로 사립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후, 총독부 토지관리국에 근무하게 된 연유로 어머니집에 하숙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이미 조선경과 공주에서 결혼한 몸이었으나 다시 한윤명과 23세에 서류상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결혼을 하였고, 이후 금광을 찾는 사업가로 변신했으나 가정생활에 도움이 되지 못하여 어머니에게 의지함.
5세 (1918년)
와룡동의 서당에 나가 《천자문千字文》부터 시작하여 한학漢學을 배움. 이어 《계몽편啓蒙篇》을 배우기 시작했고 붓글씨도 겸하여 공부함. 이것이 필묵을 대하게 된 첫번째 인연이며, 후일 이때 배웠던 한학漢學이 평생을 청각장애자로서의 예술 생애를 걸어가는 데 있어 막대한 도움이 되고 기초적 사상이 됨.
6세 (1919년)
와룡동 서당에서 《계몽편啓蒙篇》·《통감通鑑》 1권을 배움. 인사동에 새로 개설된 중앙유치원에 입학하여 오전에는 유치원에서 신학문을, 오후에는 서당에서 구학문을 동시에 공부함. 중앙유치원의 유치원 기금 모금 마련을 위한, 종로의 기독교청년회 강당에서 있었던 연극에 운보는 주요 역할을 맡아 참가하며, 이것이 운보에게 생생한 시청각으로 진행된 최초이자 최후의 무대가 됨.
7세 (1920년)
봄/중앙유치원을 졸업하고 바로 옆의 승동보통학교에 입학. 등교 둘째날 지금의 장충단공원에서 전교생 소풍 겸 운동회가 열려 할머니와 함께 참석했으나, 행사가 끝난 직후 장티푸스로 눕게 되고, 이후에 병은 치료되나, 체질상 상극임에도 불구하고 인삼을 달여먹어 고열을 일으켰고, 청각신경까지 마비되어 후천성 귀머거리(전농)가 됨.
10세 (1923년)
중앙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가서 미술대학을 2학년에 중퇴한 외삼촌이 방학 때 가끔씩 집에 들러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았으며,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남게 됨.
당시 운보의 병 치료는 물론이고 부친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어 어려운 지경에 이르자, 어머니는 개성 정화여학교貞和女學校 교장으로 재직 중이던 김정혜의 부름으로 그 학교의 교사로 채용됨. 운보 역시 어머니를 따라 개성으로 가서 줄곧 김정혜의 집에 함께 기거함.
12세 (1925년)
모친은 더 이상 서울에 있는 가족들과 헤어져 지낼 수가 없어 개성의 정화여학교를 사임하고, 2년여 만에 다시 경성 집으로 운보를 데리고 돌아옴. 김정혜의 추천으로 YWCA의 전신인 태화여자관에 직장이 마련되었음.
등교 둘째날 운동회 참가 후 그만두었던 승동보통학교의 1학년 2학기에 복학하나, 4,5년 아래의 급우들과 어울려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고, 당시에는 한글과 일본어를 모두 모르는 상태임. 수업시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림들을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고, 다시 그 그림들을 노트의 빈 공간에 옮겨 보려는 노력을 시도함. 사람·기차·새·꽃·나무·개·산 등을 많이 그렸음.
13세 (1926년)
승동보통학교 2학년이 되었으나 문맹이었으므로 학업에 열의를 가질 수 없었음. 그러나 어머니 한윤명 여사가 서당에서 배웠던 한자를 근거로 하여 귀가 후 글을 가르치기 시작함. 이 무렵을 전후하여 어머니는 직장을 미국인 부스 박사가 있는 서울역 앞 세브란스 병원 치과 간호사 자리로 옮김.
14세 (1927년)
승동보통학교 3학년이 되었고, 역시 한글과 일본어를 어머니에게 배움.
15세 (1928년)
승동보통학교 4학년이 되었고, 어머니로부터 배운 한글과 일본어를 어느 정도 깨우침.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하던 어머니가 우연히 사준 《어린이》라는 잡지를 읽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에 심취하기 시작함. 한편으로는 1학년 때부터 즐겨 그려오던 그림도 계속됨. 서양 명작과 단행본들을 탐독하여 작문에서도 재능을 보임.
한편으로 운보의 보통학교 시절은 성격이 극히 활발하였고, 모험심이 있었고, 개구쟁이처럼 뛰놀기를 좋아하였고, 조선어 독본·작문·산수·미술시간에 특히 뛰어난 재능을 보임. 운동에도 재능을 보여 전국체육대회 육상선수로 출전하기도 하는 등 농아로서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극복해 감.
16세 (1929년)
승동보통학교 5학년이 되었고, 이웃집의 잡화상집 장남이던 제일고보(경기고) 2학년 한종원과 만나게 되어, 목탄으로 영화배우들의 초상화 그리는 법을 배우며 의기 또한 투합됨. 한종원은 그의 나이 겨우 20세쯤 폐병으로 장가를 든 지 몇 달 안 돼서 죽게 되며, 운보가 미술을 전공하게 된 또 하나의 동기가 됨.
이후에 스승이 될 이당 김은호가 후원자 이용문李容汶의 도움으로 허백련許百鍊과 2개월간 북경을 다녀옴.
17세 (1930년)
봄/승동보통학교 졸업(당시 승동보통학교에 다닌 것은 5학년으로 종료).
가을/졸업 후 목수를 시켰으면 하는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운보를 화가로 키울 것을 결심한 어머니는 친구인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의 애제자 향당香塘 백윤문白潤文의 누나에게 부탁하여 권농동에 있던 이당(낙청헌絡靑軒)을 찾아 입문을 허락받음. 이튿날부터 수묵의 농담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종교도 감리교에서 당시 이당이 다니던 장로교파인 안국교회로 옮기게 됨. 당시 이묵헌以墨軒에는 백윤문·한유동·장운봉 등 선배들이 학습하고 있었음.
18세 (1931년)
제10회 조선예술전람회(선전鮮展)에 널뛰기를 그린 <판상도무板上跳舞>로 처음 입선하여 미술계에 데뷔하게 됨. 이당 문하에 입문한 지 반년 만의 일이었으며, 이 작품은 150호 크기로 어머니의 직장인 세브란스 병원 치과의사 미국인 부스 박사가 구입하였으며, 6·25 당시 분실됨. 어머니가 선전 출품 며칠 전에 ‘운포雲圃’라는 화명을 지어 주었으며, 해방되기까지 줄곧 사용하게 됨.
부스 박사는 이후 1940년 일본인에 의해 추방당하기까지 미국인 자녀들의 동양화를 지도하도록 주선한다던가, 그림을 팔아 주면서 운보를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주었고, 또 하나의 은인적인 역할을 함. 후일 운보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은인 다섯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음.
19세 (1932년)
1월부터 창경궁을 다니며 스케치해 온 것을 안국교회 목사 사택에서 펠리칸 한 쌍을 그린 300호 크기의 <수조水鳥>가 제11회 선전에 입선하게 됨. 지나치게 대작이어서 전시가 어렵다는 이유로 낙선될 뻔했으나, 일본인 심사위원의 항의로 입선하게 되었다는 과정상의 일화가 있음.
10월 15일 어머니가 허약한 몸으로 출산 후 산후 부황과 심장마비·뇌일혈 등이 한꺼번에 겹쳐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 후일 운보는 자신의 생애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세 사람의 여인으로서 외할머니 이정진과 어머니 한윤명 그리고 부인 우향을 꼽았을 정도로 세 사람의 은혜는 절대적이었음. 운보는 어머니를 여의면서 극심한 충격과 시름에 잠김.
어머니의 급서로 당장 생활이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자, 스승인 이당 김은호는 특별한 배려로 그림을 팔 수 있도록 주선하고, 세브란스 병원의 부스 박사 역시 외국인들에게 그림을 팔아 주었음은 물론, 여름에는 해당화가 만발한 명사십리 별장에서 소품전을 열게 해줌. 돌아오는 길에는 석왕사·금강산에 들러 스케치를 함. 후일 많은 풍속도를 그리게 된 것도 당시 부스 박사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고,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절대적인 후원자가 됨.
20세 (1933년)
연속 두 번의 선전 입선에 고무되어 바로 준비해 온 <여女>가 제12회 선전에 3회째 입선됨. 두 여인이 함께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한 여인은 만돌린을 들고 있으며, 세브란스 병원 대합실에서 스케치한 것임. 한 여인은 외숙모로 1977년 2월에 71세로 청주에서 별세했고, 다른 여인은 첫사랑이기도 했던 이소제라는 처녀임. 소제는 그때 이미 폐병에 걸려 있었으며, 목에 종양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 남자와 결혼 후 얼마 안 되어 죽음.
21세 (1934년)
<정청靜聽>으로 제13회 선전에 연 4회째 입선. 한 여인은 현재 북한에서 의사로 있는 운보의 막내누이 김기옥金基玉이며, 한 여인은 첫사랑인 이소제. 1993년에 도난당한 <전복도>를 제작함. 은사인 이당 김은호가 선전을 거부하고 가입해 있던 제13회 서화협회전에 <장기>·<모란도>를 출품하여 입선.
22세 (1935년)
제14회 선전에 <엽귀>·<금운琴韻> 등의 2점이 연 5회째 입선됨. <엽귀>는 낫을 든 어린 소년과 잠자는 갓난아이를 업은 여인이 들에서 밥을 머리에 이고 귀가하는 모습을 옥수수 밭을 배경으로 그린 수작이며,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은사인 이당 김은호가 1930년 10회전 이후 정회원으로 있던 서화협회전에 정회원으로 입회하여 제14회전에 <금琴>·<추일秋日>·<석류石榴>를 출품함.
<소와 소년> 제작.
<김기창, 장운봉, 양씨 조선화전>을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개최. 당시 풍속이 주요 소재였음. 현재의 명동인 本町의 일본인 사진재료상 대택상회大澤商會에서 흑백사진에 채색한 <사진화寫眞畵> 개인전을 가짐.
23세 (1936년)
제15회 서화협회전에 출품하며, 이 전시를 마지막으로 민족화단의 상징 서화협회전은 막을 내림.
제15회 선전에 <해녀海女>가 연속 6회째 입선. <해녀>는 200호 크기로, 해녀를 스케치하기 위해 제주도로 떠나려 했으나 목포에서 이동 해녀군을 만나 스케치했고, 파도는 이당의 화숙 동문 안명준의 안내로 흥남에서 스케치한 것을 조합하여 완성. 흥남에 갔을 때 머물던 흙방을 스케치해 두었는데, 이 작품이 다음해에 특선하게 됨. 장로교파인 안국교회 김우현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이당 김은호가 종합미술학원이 목표였던 조선미술원 개설에 참여.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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